솔라리스

이끌고 따르는 관계

Solaris 2022. 8. 30. 20:17

모든 것은 실질이다.

이해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납득할 행위가 있다면.

 

교수님께서 서울에 오셨다며 연락을 주셨다. 오랜만의 만남에 생각할 것 없이 달려 나갔다.

불러놓고 무뚝뚝하니 날 대하시는 교수님께 전처럼 사랑스런 제자의 말씨랄지 조심스레 활기 띤 행동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나이 든 그 분의 고집스런 손이 허둥대다가 음식물을 놓치거나 엎질러 묻었을 때 반찬을 집어 밥 위에 올려드리고 단단히 손목을 잡아 붙들고 과감하게 닦아드렸다. 내가 끔찍히 사랑한 사람들에게 했듯. 그분께도 갔을 뻔한 깊은 애착은 무색히 돌아서버려 나에게ㅡ 어쩌면 그에게도 시린 늦가을로 남지 않았을까.

 

 조용히 출장 안마사를 불렀다. 겉으로는 나 아직은 쓸만하다는 노익장의 기운을 풍기고 있지만, 사실 아니까. 내 지금 이 나이에도 외출의 버거움을 백분 느끼기에 스승님의 먼 길 행차의 피로를 챙기는 것, 그렇다고 해서 직접 안마를 해드리는 뻔해 보이는 그런 처신머리 짓은 내게는 맞지 않아서 말이다. 안마를 할 줄도 모르는데다가 가장 집중적으로 안마가 필요한 곳은 발이다. 

 

 여러 고심 끝에 선택한 방식은, 무리 없이 어느 정도 선이라는 서로의 입장과 깊은 애정에도 말 못하고 머뭇하는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로 작동했다. 

 

좀 더 열리는 이야기가 대화에 흘러나온다. 

 

' 자네는 좀 쉽지 않은, 아니 어려운 친구였어.'

' 존중해주셨어요. '

' 긴장하게 하는... 기백이 맑고 뜨거운 사람.'

' 아마 제 아이 다서여섯살 때 같지 않았을까 떠올려 봅니다.'

' 허허, 그렇지. 맞아. '

 

 

 뭔가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통념 상의 처신은 경험의 처절함으로 내게는 고통과 실망만 남겨줬었기에. 노교수님을 대하는 행위에 있어 관계 상 굳이 이해시키려 애쓰는 행동의 대부분은 존경심 담아서 하기에는 무리다. 과하다. 물론 아껴주신 지난날 애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마는 그가 자신의 안위를 급급히 지키느라, 허술하게 떠넘겨지고 버려진 제자로서 슬픔과 한 서린 절름발이 삶으로, 모진 앓이에 그간 그만한 정을 실제 주고 받는 거리로 지내오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아물지 못하고 벌어져 있는 상처고 바로 현재다. 

그러니 당연히 안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맞다. 그게 서로에게 마음 편하고 이상적이고,

어쨌거나 실질적 행위로 인해 받아들여지는 건은 명료하고 당연하게 자리잡는다.